
유진 피터슨의 책을 많이 읽은 독자들이라면, 피터슨이 책 곳곳에 시와 시적 언어에 대해 쓴 글들을 보셨을 텐데요, 피터슨이 시에 대해, 시 읽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정리해서 보여 주는 글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풀러신학교 평신도 사역 호머 L. 고다드 명예교수인 마크 라우 브랜슨이 1991년에 <RADIX> 매거진에 기고한 글입니다.
니나와 내가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살던 1991년 여름, 유진 피터슨은 가까이에 있는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가르쳤다. 그 시절, 그는 우리 집에서 머물며 우리의 일상적인 리듬 속으로 들어왔다. 그해 여름이 지나고 나서 쓴 이 글은 우리가 나눈 여러 대화 가운데 한 가지 주제를 따라가며 정리한 것이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다. 주석, 신학, 윤리학, 사회학, 도시 연구, 민족 연구, 전기, 공상 과학, 판타지도 읽는다. 물론 시를 “읽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시를 읽어 보려고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필요한 만큼은 배웠고, 내 서재에도 시집이 몇 권 있다. 그 시집들에 있는 몇몇 시를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내 머리는 선형적이고(시는 그렇지 않다), 내 일정은 이미 (중요한 것들로) 가득하고, 독서 계획은 벌써 (산문으로) 꽉 차 있다.
친구들 중에는 영화나 음악, 텔레비전과같은 다른 매체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나처럼 그들도 아이디어와 오락, 이미지, 간접 경험을 공급받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것들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일정은 빠듯하고, 선택지는 넘친다. 그래서 내가 시에 대해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대부분 비슷하다. “(한숨) …… 시집이 몇 권 있긴 한데,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였더라…….”
그런데도 시를 향한 유혹은 늘 나를 떠나지 않는다(그리고 친구들에게서도 그런 그리움을 어렴풋하게 감지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나는 ‘교양 있는 사람’이고 싶고, 시를 읽을 만큼 세련된 사람이라는 것을 남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 있는지도 모른다. 그보다 허영에 덜 사로잡힌 동기도 있다. 교사이자 설교자로서 언어를 다루는 일은 중요하고, 시인들이 내게 언어에 대해 가르쳐 줄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동기는 성경을 이해하고 싶은 갈망이다. 성경의 60퍼센트 이상이 시로 이루어져 있으니, 나는 하나님이 중요하다고 여기시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유진 피터슨은 영성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좋은 친구라고 말한다. 그가 시편에 관한 저녁 강의를 하던 그 여름 한 주 동안, 나는 마음속에 작은 계획을 세웠다. 커피콩을 갈고, 베이글을 굽고, 머그잔을 채워 데크 의자에 앉아 있던 몇몇 아침에 나는 내 (꽤 모호한) 관심을 그에게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주를 지내며 우리는 함께 하이킹을 하면서 시에 대해 이야기하고, 레모네이드를 마시면서 시를 읽고, 목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에 대해 더 깊이 이야기했다.
인식과 전환
“시를 읽고 나서 우리는 더 많은 정보를 얻지는 않습니다. 더 많은 ‘경험’을 얻지요.” 피터슨은 이렇게 쓴다(「요한계시록, 현실을 새롭게 하는 상상력」, IVP 역간). 나는 사실, 지식, 정보 같은 것들을 가치 있게 여긴다. 역사나 신학, 사회과학을 읽으면서 그 내용이 나와 내 가족, 내 교회, 내가 사는 도시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과정을 좋아한다. 그러나 시는 다르다. 오든(Auden)은 피터슨의 말을 이렇게 부연한다. “시는 그것이 쓰인 언어를 존중하는, 잘 만들어진 언어적 대상이어야 한다”(이 부분은 뒤에서 더 다룬다). “둘째, 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현실에 대해, 그러나 독특한 시각에서 바라본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요한계시록, 현실을 새롭게 하는 상상력」).
나는 새로운 관점을 얻기 위해, 혹은 그저 정신을 맑게 하기 위해 종종 삼나무 숲을 산책한다. 도시에서 겪는 일들 속에서 내 영혼은 쉽게 무뎌진다. 오클랜드에 있는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지역 공원 입구가 있다. 그 공원에는 수천 에이커에 달하는 언덕과 나무, 시냇물, 산책로, 동물들, 그리고 …… ‘침묵’이 있다. 피터슨 역시 늘 산책하는 습관이 있어서 나와 함께 그 길을 걸었다. 그런데 그가 이 경험을 시 읽기와 유사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그는 우리가 아스팔트 길에서 숲으로 옮겨 온 ‘전환’에 주목했다. “당신의 생각이 멈춘 게 아닙니다, ‘달라진’ 거죠. 우리는 삼나무들을 보면서 ‘이 나무가 몇 미터이고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고 묻지 않았어요. 그저 그것을 경험하면서 그 자리에 있었던 거죠. 당신은 내게 삼나무의 동그란 패턴을 가리켰는데, 나는 한 번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것을 인식시키고 나서는, 여기저기서 그 패턴이 보이더라고요. 우리는 ‘이게 무슨 의미지?’라고 묻지 않았죠. 대신 그 현실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간 거예요.
당신은 도시에서 숲으로 옮겨 가는 전환을 자주 하니까, 의식적으로 결심하지 않아도,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산문에서 시로 옮겨 가는 전환에는 익숙하지 않지요. 그런 연습도, 훈련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직접 개입해야 해요. 이렇게 말하면서요. ‘의미를 찾지 말자.’ 숲에 들어가듯이 시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거죠.”
그래서 나는 내 기대를 바꿔야 했다. 나는 언제나 의미를 찾으려 하고, 새로운 정보, 새로운 분석, 새로운 방법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터슨은 말한다. 시인은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 새로운 경험, 전혀 다른 감각 체계를 제시한다고. “시인은 너무 많은 구경으로 눈이 흐려지고 너무 많은 수다로 귀가 무뎌진 우리에게 우리 주변과 우리 내면에서 놓치고 있는 것들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언어를 사용해 우리를 현실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죠. 단지 삶이 어떠한지를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한가운데로 우리를 밀어 넣고 끌어당깁니다. 시는 급소를 찌릅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언어가 아니라 폐부를 건드리는, 뿌리 언어입니다. 시는 우리가 전혀 몰랐던 것을 알려준다기보다,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거나 눌려 있거나, 우리가 잊었거나 지나쳤던 것을 다시 알아보게 합니다”(「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 IVP 역간).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신문과 전문 저널 사이에 시를 끼워 넣고는 돌아다니면서 읽을 수는 없었다. 공간을 만들어야 했다. 기대하고 있는 바들을 비워 내고, 전환을 의식해야 했다. 이것은 일상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위해 내가 노력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실제로 피터슨은 시와 기도를 연결하는데, 나는 그가 하나님에게서 그 생각을 얻었다고 믿는다.
시(詩)와 영성
“성서의 예언자와 시편 기자가 모두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까요?”(「목회자의 영성」, 포이에마 역간) 피터슨의 「하나님께 응답하는 기도」는 기도와 시의 관계를 가장 폭넓게 설명한 책이다. 그는 그 책에서 시편은 새로운 계시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응답하는 언어’를 제공한다. 시편은 개인과 공동체가 사용할 수 있는 기도들의 모음으로, 우리의 손을 이끌어 거룩하고 관계적인 언어 속으로 안내한다.
우리는 기도로의 부름에 반응해야 한다. “시인은 기도를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도록 당신을 밀어붙입니다. 바로 ‘속도를 늦추는 것’이죠. 시는 빨리 읽을 수 없습니다. 출근길 아스팔트를 밟으며 생산성을 따지던 평소 마음가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이 만들어 내지 않은 현실에 순종해야 합니다. 시는 세 번은 읽어야 감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시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당신이 보지 못하는 진실을 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이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굴욕스럽게 느끼게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리가 바로 기도하기에 적절한 자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며 산문에서 시로 전환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금 상황이 어떠한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지를 말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생산 지향적이고 목표 지향적입니다. 미국에서는 응답받은 기도에 지나치게 집착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좀 이상한 일입니다. 성경은 그런 것을 강조하지 않으니까요. 성경에 나오는 기도에는 ‘내가 부를 때 응답하소서’라는 말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기도를 토해내고 나면 잊어버립니다. 성경에는 응답받은 기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것을 기억하거나, 응답에 대한 일정을 관리하려는 강박도 없습니다. 기도의 최종 결과물은 ‘어떤 산출물’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인식의 전환, 즉 산출물에 덜 집착하도록 우리를 훈련합니다. 이는 언어를 대하는 방식, 삶을 대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터슨은 우리에게 시편을 기도로 삼으라고 권한다. 그 안으로 들어가 읊조리고, 상상하고, 느끼면서, 하나님과 선함, 창조와 언약, 거짓과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기도하는 동안 변화되도록 말이다..
이러한 언어 방식(산문과 시)의 차이는 내 기도뿐 아니라 성경 공부 방식도 바꾸기 시작했다. 물론 역사 연구, 사회 분석, 신학적 탐구를 버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문학 장르가 요구하는 전환에 기꺼이 귀를 기울이려 한다. 창세기 1장의 예전적 경외, 레위기 25장의 공동체적 기쁨, 예언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외침, 그리고 팔복에 나타난 새 왕국의 리듬 속으로 들어가길 소망한다. 피터슨은 「요한계시록, 현실을 새롭게 하는 상상력」(IVP 역간)에서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며 시인인 요한을 이렇게 소개한다. “시는 객관적인 설명의 언어가 아니라 상상의 언어이다. 시는 현실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 우리를 그 현실 속으로 초대한다.” 요한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 이전까지 우리는 이미 완전한 계시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구원과 제자도의 부르심을 알고 있다. 그래서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정보가 부족한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 오히려 익숙함과 피로 때문에 우리를 둘러싼 영광을 보지 못하는 위험에 처해 있을 뿐이다…….”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강렬하게 느끼기를 원한다. “그는 우리가 더 정확하게 생각하거나 더 나은 행동을 하도록 훈련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더 대담하게 믿기를 원한다……”(「요한계시록, 현실을 새롭게 하는 상상력」).
나는 약간의 신학적 명료성과 세상에 대한 더 많은 사실, 그리고 좀 더 동기를 부여해 주는 말이 학생들과 회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다. 그러나 어쩌면 그보다 먼저, 내 상상력을 다시 불붙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아마, 내가 다듬는 말들이 우리가 서로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더 깊이 이끌리도록 도울지도 모른다.
언어의 수호자들
나는 사람을 파괴하는 데 말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잘 알고 있다. 거짓과 조작으로 인해 개인과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언어는 여러 역할을 한다. 교수이자 목회자인 나 역시 말에 의존한다. 그리고 행정가든, 부모든, 기술자든, 이웃이든, 누구나 언어의 사용과 남용에 의존하며 그 영향을 받는다고 믿는다. 만약 우리가 광고나 메모, 신문을 읽는 것만큼 정기적으로 시를 읽는다면, 우리의 언어는 더 구원받고 더 유익해질 것이다. 피터슨은 시인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라고 본다.
“시인들은 언어를 돌보는 자이자, 말의 목자이다. 시인은 말이 해를 입거나 착취당하거나 오용되지 않도록 지킨다. 말은 단순히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언가이다. 저마다 고유한 소리와 리듬을 가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주된 목적으로 삼는 일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거나, 우리에게 무엇을 시키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장난기 있는 훈련으로 단어에 귀 기울임으로써, 우리가 단어 자체와 단어가 우리 앞에 펼쳐 보이는 현실 모두를 더 깊이 존중하도록 이끈다”(「목회자의 영성」).
피터슨은 인간 언어의 발달을 세 단계로 설명한다. 1단계 언어는 기초적 언어로, 아기의 소리가 부모에게서 아무 의미 없는 또 다른 소리를 끌어내는 데서 시작된다. 이것은 1차적 경험이다. 1단계 언어는 연인 사이에 나누는 종잡을 수 없는 말들 속에 다시 나타난다. 성숙한 형태에서 이 언어는 시인의 영역이다.
2단계 언어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연결을 만들며, 정보를 주고받는 데 사용된다. 학교 교육이 이 2단계 언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3단계 언어는 동기를 부여하기 위한 언어다. 설득, 판매, 조종, 강요 등, 말로 타인을 움직이는 영역이다. 말은 힘을 가진다. 이것이 정치와 광고의 영역이다(「목회자의 영성」, 「응답하는 기도」). 피터슨은 1단계 언어를 이렇게 확장해 설명한다. “1단계 언어가 자연스러운 수준에서 작동하도록 내버려두면, 미완성 문장과 잡히지 않는 문구, 그리고 수많은 은유가 존재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시나 의미를 찾는 일을 멈추고, 모호함을 받아들이게 될 거예요. 좋은 시인은 당신을 다층적 현실의 리듬, 침묵과 은유로 이끄는데, 그것들은 동시에 서로 다른 다섯 가지 경험을 전해 줄 수도 있어요. 은유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알려주기에는 아주 형편없는 방법이죠. 당신은 아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시인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는 진리와 실제를 발산하는 단어와 이미지의 덩어리 속으로 당신을 참여시키는 데 관심이 있어요. 당신이 그 경험에 참여하기만 한다면, 어느 이미지를 받아들이든 상관없는 거죠. 숲에서 당신은 내가 삼나무를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 혹은 소나무를 더 좋아하게 되었는지 신경 쓰지 않았지요. 당신이 준 것은 그 자리에 있는 것, 그 경험을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기도는 1단계 언어다. 예언과 묵시도 1단계 언어다. 설교 또한 1단계 언어일 될 수 있다. 그런데 사회는 이 귀중한 도구를 우리에게서 빼앗으려 한다. 수많은 힘이 우리 말들을 훔치고 정의(定義)를 바꾼다. “좋은 삶”(the good life), “사랑을 나눈다”(making love), “생계를 꾸린다”(making a living), 영성을 다루는 “자기계발”(self-help) 서적들처럼 단어를 도둑맞고 이미지가 값싸게 변질될 때, 우리는 삶을 빼앗긴다. 물론 정보 전달과 동기 부여는 언어의 정당한 역할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제공하는 친밀함과 경험의 언어를 잃어버려도 되는가? 우리는 이미 광고와 데이터에 깊이 함몰되어 있다. 그러므로 언어가 온전해지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시라는 또 다른 몰입을 선택해야 한다.
어쩌면 나는 그리 바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종종 책을 다시 읽는다. 그 관계에 다시 들어가고 어떤 동행을 경험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피터슨은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책을 다시 읽을 때,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당신은 결말도 알고, 어떤 내용이 나올지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은 겁니다. 내가 계속 바르트를 읽는 이유이지요. 이것은 서핑과도 비슷합니다. 파도는 늘 비슷하게 움직이지만, 어떤 파도를 제대로 탔을 때 짜릿함을 느끼잖아요. 당신은 교훈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안으로 훌쩍 들어가 동화되고 참여하는 거예요.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요.”
나는 이미 피터슨의 시들이 다가가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목회자의 영성」). 최근에는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에게 사로잡히고, 앨리스 워커(Alice Walker)에게 놀라며, G. K. 체스터튼(Chesterton)에게 즐거움을 얻고, T. S. 엘리엇(Eliot)과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의 사색으로 이끌렸다. 그리고 피터슨이 추천한 루시 쇼(Luci Shaw), 윌리엄 스태퍼드(William Stafford), 월터 왕게린(Walter Wangerin), W. H. 오든(Auden), 체스와프 미워시(Czeslaw Milosz)와 같은 작가들에게도 마음이 향하게 되었다. 이제 나는 시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조금씩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맞물려, 일상에서 기도하기 위한 시간과 공간도 더 많이 마련하고 있다. 더 다양한 감각으로 시편을 읽고, 생산성 중심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태도를 조금 덜어내면서 말이다.
어쩌면 자만심과 생산성에 대한 강박이 나를 시로부터 멀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질 필요는 없다. 우리는 대부분 이미 ‘비생산적인’ 활동들, 즉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다시 보고, 산책로를 되짚어 걷고, 음악을 다시 듣고, 책을 다시 읽는 일들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를 다시 읽는다고 해서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피터슨이 말했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숲속을 걷는 일, 누군가의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는 일, 커피를 마시기 위해 콩을 직접 가는 일, 토요일 아침을 느긋하게 보내는 일처럼 더 느리고 비생산적인 방식들”이다. “우리는 이런 의식들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삶의 방식을 전문적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일 뿐이죠. 영의 우위를 회복하고 삶에 창조성을 되찾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가능한 모든 도움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귀한 도움이 됩니다.”
[챗GPT 번역 후 퇴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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